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문단 편집) === 죽음 === 쾨펜힐러의 석방과 함께 [[알렉스 카젤느]]의 노력으로 양 웬리 역시 [[하이네센]]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파트리체프도 인사순환의 일환으로 에코니아를 떠나게 되어 두 사람이 [[하이네센]]으로 돌아갈 때까지 쾨펜힐러를 돌보게 되었다. 쾨펜힐러는 40여년만에 포로복을 벗고 에코니아에서 유일한 신사복 전문점에서 맞춘 정장을 입은 채로 에코니아를 떠나 하이네센으로 갔다. 그러나 우주력 789년 1월 1일, 중간 경유지인 행성 마스지드의 우주항에서 쾨펜힐러는 숨을 거두었다. 평소처럼 맥주를 가지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1월 1일이 되자 파트리체프, 양 웬리와 함께 건배를 나누다가 마치 잠들듯 조용히 사망했다. 의사 말로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사망 직전에 마시고 있던 [[맥주]]의 취기가 올라 있었던 탓에 고통없이 마치 잠들 듯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원래 [[심장마비]]는 심각하게 아프게 죽는 병이다.] 자유의 몸으로 첫 새해를 맞이하면서 중간 경유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뭔가 아련하다. [[파일:external/pds25.egloos.com/e0006522_572df3d24feae.jpg]] 43년만에 입어본 양복차림. 그리고 죽기 바로 몇 분전. 사후 그의 시체는 우주항 시체보관실에서 잠시 보관되었다가 [[알렉스 카젤느]]의 수배로 마스지드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남긴 유품은 양이 하이네센으로 가져오며, 일부는 제국에 있는 유족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B급 중요사항으로 지정되어 25년간 봉인되었다. 상록수가 우거진 공동묘지에서 쾨펜힐러의 시신은 그가 애용하던 펜과 손목시계 등과 함께 땅에 묻혔다. 모비명은 양 웬리가 썼는데, 제국 공용어로 새긴 까닭에 150디나르 정도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한다. 묘비명은 '''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제국력 408~480년. 생전 몇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